물과 역사, 그리고 연기(緣起)와 자연_이진명(독립큐레이터)

물과 역사, 그리고 연기(緣起)와 자연

백정기 작가의 작업은 자기의식의 심화과정을 통한 존재사유의 구명이라고 짧게 정의할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과학적 프로세스라는 합리적 사유의 연장에 있다. 그러나 그 실질적 내용은 상당히 신화적이다. 과학과 신화라는 대적적(對敵的) 내용을 미적 형식으로 조화롭게 융화시킨다는 것은 일견 보기에 쉽게 흘려 넘길 수 있는 사태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지대한 의미로 다가온다. 작가의 작업은 이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지성을 통한 계획과 계산만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실존적 문제상황과 매우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갖는다. 작가의 작업세계가 처음으로 주목을 끈 것은 임의의 인물들에게 바셀린을 발라서 헬멧이나 갑옷, 심지어 바셀린 글러브를 착용시켰던, 2007년도의 바셀린 갑옷&투구(Vaseline Armor & Helmet)라는 작품에서였다. 바셀린은 19세기 미국 펜실바니아 유전 파이프에 남아있던 하얀 기름을 근로자들이 우연히 상처에 발랐다가 놀라운 지혈작용과 치료효과를 경험하고 세계로 보급된 화학물질로 색슨어 바소르(wassor, 물)와 그리스어 오레온(oleon, 기름)의 합성어이다. 바셀린의 치료 메커니즘은 상처에 수분이 증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시킴으로써 회복을 증진시키는 기능이다. 여기서 핵심 포인트는 수분이다. 작가는 유년기에 치명적 부상을 경험했다. 당시 시초의 응급조치는 아마도 바셀린이었을 것이며,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는 작가의 뇌리에 바셀린이라는 물질이 연상되었을 것이며 수분의 치유효과에 대해서 수없이 명상했을 것이다. 이 수분에 대한 명상은 물이라는 물질에 대한 탐구로까지 발전한다.

물의 메타포는 종교와 관련이 있다.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남부로 갈라지는 문화 벨트의 대세를 바라보면 동쪽은 황하중심의 유교문명권이다. 유교문명권의 핵심은 영육, 혹은 심신이원론의 지배가 없는 합리적 세계관이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말은 과학적 이성주의가 아닌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격하는 상식의 세계로서의 합리주의를 가리킨다. 반면에 파미르 고원의 서쪽과 남쪽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지역, 그리스, 이집트,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인도에 이르는 지역은 영육의 이원론과 지상과 천국의 이원론이 지배하는 종교적 비합리의 문화이다. 풍부한 수량과 일정한 일조량은 생산력의 원천이다. 일찍이 하(夏) 나라의 우(禹) 임금은 황하강을 치수(治水)해서 과불급이 없는 조화로운 농경사회의 기반을 조성했다. 괴력난신의 종교가 침입할 근간을 미봉에 예방했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에서 발생한 그노스티시즘, 유대교, 이슬람교, 오르페이즘, 헤르메티카, 배화교, 힌두교 등은 철저한 영육의 이원론적 색채를 지닌다. 영육 이원론은 천국을 달리 상정해서 지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극도의 처방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발생한 지상의 고통은 물의 부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생산력의 불안은 침략과 압제의 악순환을 야기시킨다. 침략과 압제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낳는다. 사실 메시아는 생산력의 안정에 대한 상징체이다. 물이 메시아이며 물은 최고로 좋은 것이다.  작가가 2008년 한해 동안 이집트, 모로코, 유럽 등지를 주유하면서 기우제(Pray for Rain) 작업과 리드 리버(Read River)라는 작업에 천착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우제 작업에서 이집트와 모로코 등지의 축적된 지역 문명사와 모던라이프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파열음을 기우제 형식을 빌어 치유시켰으며, 리드 리버에서는 강물을 채집해서 디지털 현미경으로 사진을 찍어 시각적 정치(dexterity, 精緻)를 연출했다. 

작가가 물에 대한 정치하면서도 미세한 정감의 명상을 관객이 몸소 실감할 수 있는 스펙터클한 양태로 변모시킨 계기가 바로 <스위트 레인(Sweet Rain)>이라는 전시였다. 이 전시는 전시장 건물 전체에 대한 혼합기, 방수처리, 모터, 물 분사 노즐, 배수 시스템 등 공학적 기술이 총동원된 전시였다. 사카린과 물을 혼합시킨 용액이 빗물처럼 전시장 천정에서 쏟아지는 장관을 작가는 연출시켰다. 달디단 빗물은 문명의 총아에 대한 은유이다. 농경사회 사람들이 느꼈을, 비 올 때의 그 신명 나는 느낌을 과학주의에 사는 우리가 똑같이 느끼는 일이란 실로 불가능할 것이다. 이 신명남을 현대적 기제와 시적 은유를 적절히 섞어 재현한 것이 바로 스위트 레인의 위업이라 할 수 있다. 물에 대한 5년여 동안의 명상이 작가에게 제공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상처와 보호본능, 그리고 여기에 개제되어있는 수분의 역할에서 비롯된 물의 치유 메타포를 문명의 성장과 쇠락의 인과관계의 원인자로서의 물의 메타포로 격상시키는 한편, 기우제의 느낌을 총체적으로 체화시킨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이력의 과정에서 세상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인과관계, 즉 연기(緣起, Dependent Arising)에 대해서 미묘하게 체감했을 것이다.

2011년 작가는 물에 대한 메타포를 잠시 떠나서 ‘히스토리컬 안테나(Historical Antenna)’라는 작업에 착수한다. 역사적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교량은 최고로 좋은 안테나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의 동상은 인물의 전기에 대한 인식이 부재할 때 우리에게 무의미하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교량은 차량증가와 시대변화에 의해 갈수록 무용해진다. 과거 속으로 차츰 쇠락해가는 이 대상들에게 무언가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바로 ‘히스토리컬 안테나’이다. 리시버를 동상이나 교량에 연결하고 리시버에 내장되어있는 주파수 설정기를 의도적으로 제거하면 동상이나 교량에 꼭 맞는 주파수만이 리시버에 수용된다고 한다. 이 안테나의 성능이 너무도 우수한 거대체라서 지구반대편의 어느 나라의 주파수가 잡힐지 모른다고 한다.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나라의 노랫말이나 뉴스 멘트가 흘러나온다고 한다.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 고정되어있는 대상이 사실은 전혀 뜻밖의 사태와 소통하고 있다는 진실을 작가는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후 작가는 물질을 시각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일례로 슬로바키아 레지던시 경험을 살려 슈트로보(Sturvo)와 에스떼르곰(Esztergom) 지역의 풍경을 시각화한다. 그런데 이 지역 풍경을 인화하는 방법에 대하여 특기해야 한다. 지역 강물의 산도(acidity)를 이용해서 리트머스 종이에 인화한 것이다. 이 지역 강물의 산도는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관련되는 생태지표일 것이다. 문명의 풍경과 문명이 발생시킨 배설물을 연계시킨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연장선이 바로 2012년 대안공간 루프 전시에도 연장되어 있다. 작가는 설악산의 단풍잎을 모아서 메탄올에 용해시킨 후 색소만을 분리추출했다. 그리고 이 추출된 자연색소들을 잉크젯 머신에 연계해서 풍경사진을 프린트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번 전시는 시각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 말하는 케케묵은 논쟁을 펼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각적 대상을 물질화시킨다거나 물질을 시각화시킨다거나 말하는 변용(transformation)의 논리를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다. 서양에서는 대상을 가리켜 나의 주관적 정신의 프로젝션(투사)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백정기는 어떠한 시각적 대상이 그 자체가 갖는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에 의해 아름답거나 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가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연기(Dependent Arising)에 의해서 유의미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잎사귀에 단풍물이 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과 확률이 필요할 것이다. 그 수많은 조건과 확률이 특정 작업의 의도와 재차 만나야지만 비로소 유의미한 시각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즉, 무수히 많은 인과고리의 연결그물이야말로 시각적 대상에 파워를 싣는 원인임을 역설한다.

근대적 인간(Modern Man)은 근대사회의 키워드였으며 근대적 인간이 성숙해지기 위해서 인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인간을 형성시켜주는 것이 계몽적 이성(enlightened reason)이었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이성주의는 현재 위기에 봉착해있다. 인간이 목적이었던 시절에서 수단이 되어버린 시절인 것이다. 이를 호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이라고 명명하면서 서구사회의 위기를 경고하였다. 그 이후에 다변화된 이성에 맞추어서 다원주의를 용인하자는 방향으로 선회한 비판적 이성(critical reason)이 논의된 지 오래지만 더 이상 그럴 듯한 담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서구사회의 역사 속에서 계시적 이성(revealed reason)이 대세였을 때 종교미술이 극성기에 있었고, 그것이 계몽적 이성으로 기울었을 때 인문주의적 예술이 발달했다. 도구적 이성의 음울이 시대를 덮쳤을 때 모더니즘 예술이 꽃을 피웠고, 비판적 이성이 등장했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허울 아래 미술은 갈 길을 잃었다. 그 이후는 무엇일까? 이를 고민하기 보다는 신화적 상상력과 인문주의적 교양, 그리고 진보하는 과학의 힘이 서로 통섭되면서 조화를 이루는 전인적 인간(all-over man)의 이성이 필요할 것이다. 백정기 작가의 작업 내용과 상상력, 그리고 스케일은 앞서 말한 내용을 충분히 성취하는 전인적 인간의 미덕을 담지한다.

이진명(독립큐레이터)